혈을 뚫어라.
주제는 때이다. 그 때는 갖추지 못했으나 지금을 갖추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분석해라. 시간은 훈련이다. 인내는 훈련의 일종이다. 지금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다 하여도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때가 되면 무엇이 변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감각을 키워라. 내가 반응하면 양성자도 반응하고 양성자가 반응하면 중성자도 반응하는 것이다. 반응은 두 물체가 동시에 오는 것이며 느끼는 것은 항상 정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모르는 척은 본인 스스로만의 합리화니 안타깝게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내가 반응했다는 것은 저 사람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명심해라.
반응이 오면 이행해라. 자존심을 먼저 내려놓는 자가 중성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핵심 키워드다. 아래가 가벼우면 위는 무거워진다. 아랫것 때문에 위의 것을 놓치지 마라. 아랫것은 사람을 쫒아내고 위의 것은 사람을 찾아오게 만든다. 위의 것을 일부로 만드는 것은 위압을 주려는 자지만 자연스레 오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협상을 하려는 자이다.
협상을 할 때는 그가 왼쪽을 쓰는지 오른쪽을 쓰는지 자세히 느껴라 생명은 왼쪽 사망은 오른쪽이다. 고질과 악질이 나오는 오른쪽 기로 이야기를 하는 자는 멀리해라. 안되더라도 긍휼과 선성을 쓰려는 자는 가까이 해라. 이야기를 할 때 습관적으로 오른쪽 기를 쓰는 자는 차마 이물질로 쓰는 것도 싫은 쓰레기보다 못한 자이다.
왼쪽 혈을 뚫은 사람은 이미 선이 가득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절대 놓치지 마라, 최고의 전자가 될 수 있다. 오른 쪽 혈을 뚫은 사람은 악으로 가득 차 고지식해진 사람이다. 사람을 분간해라. 이 사람이다. 싶다 해도 여차하면 죽이고 싶어질 수도 있다.
모든 일과 주제는 생각을 갖추어졌을 때 그의 맞추어 결이 맞추어진다. 오해를 하는 것은 생각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갖추어진 주제와 일을 보고도 되려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영과 혼이요 사망은 육체로부터 나온다. 경전에서 거론되는 말이다.
영과 혼의 생각을 하는 자가 생명을 거론하고 육적인 생각을 하는 자가 사망을 거론한다.
생명을 거론하면 생명을 받아드려라, 생명에는 주장이 선하고 언제나 배려와 긍정이 섞여있다. 하지만 고지식하기에 더 나아가 안 좋은 현상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자존심과 악질을 받아주는 사망의 태도도 필요하다.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서 무엇이 생명이고 사망인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과 사망의 역할은 언제나 달라질 수 있다. 교만한 자는 사망을 사망으로 겸손한 자는 사망을 생명으로 만들 수 있다.
무엇인 선인지 무엇인 악인지는 영혼과 육체를 이해하면 분간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만 곧이 생각하는 것도 사망을 항상 내치는 것도 고지식하기에 두 개의 것을 조화롭게 이용할 줄 알아야 될 것이다.